Intro: 당신의 행복지수를 높여줄 비타민 무비
감수성이 풍부한 10대였을 때 이 영화를 봤다면 오랫동안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 같다. 포스터 문구대로 '행복지수를 높여줄 비타민 무비'인 줄 알았더니 웬걸 나에게는 핵폭탄급 최루성 영화나 다름없었다.
물론 나에게서 온 편지는 비극적인 영화가 아니다. 9살짜리 여자아이가 생애 첫 번째 친구를 만나면서 눈부신 추억을 만들어가는 영화가 비극일 리 없다.
어린아이들의 만남과 이별, 성장이라는 주제에 맞게 이 영화는 대체로 밝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이 가족, 문제가 있다
영화 나에게서 온 편지의 배경은 1981년 프랑스이다. 주인공인 라셸(줄리엣 곰버트)은 개학 전날 가방을 메고 잠든다. 또래에 비해 걱정이 많은 라셸. 심리상담사 트레블라 선생님은 라셸이 아닌 다른 가족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진단을 내린다.
그러고 보니 라셸의 엄마, 아빠는 각자의 삶을 사느라 바빠서 서로에게 소홀하다. 부부간의 권태기는 낡아빠진 부엌에 비유된다. 아빠 미쉘(드니 포달리데스)은 아내의 부탁에도 자기 집 부엌을 고치지 않는다. 엄마 콜레트(아그네스 자우이)는 일과 가정 양쪽 모두에 충실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겉으로는 멀쩡해보이는 라셸의 가족은 사실 다들 외로움을 느낀다. 같은 공간에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이들 가족이 갖고 있는 결함은 사실 현실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결함은 부모·자식 간의 대립, 부부간의 권태기와 같은 형태로 드러난다.
그러나 라셸의 가족은 갈등으로 인한 파국을 맞는 대신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사건의 발단은 라셸이 발레리를 만나며 시작된다.
생애 첫 번째 친구와의 만남
개학 첫날 라셸 앞에 나타난 엉뚱하고 발랄한 소녀 발레리(안나 르마르샹), 그녀는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란 라셸에게 처음으로 일탈을 경험시켜준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가족 구성원들 간의 유대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생애 첫 번째 친구인 발레리를 만난 라셸은 세상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반에서 제일 예쁜 친구를 부러워하거나 친구의 오빠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남녀 간의 성에 눈뜨기도 한다.
나에게는 그 과정들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였다. 라셸이 겪는 일들은 내가 과거에 지나온 성장 과정이지만 일부는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두 여자아이가 한바탕 소통을 벌이는 장면들은 프랑스 영화하면 떠오르는 톡톡 튀는 연출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세상 다 산 표정의 라셸과 어른 뺨치는 연기를 선보인 발레리 역의 아역 배우들도 인상 깊었다.
쉿, 어른들의 사정
한편 영화 초반부터 짐작할 수 있었던 콜레트-미셸-까뜨린의 삼각관계는 예상대로 흘러간다. 자기 집 부엌은 나몰라라 하던 미셸은 발레리의 엄마 까뜨린(이자벨 까레)의 부엌을 발 벗고 나서서 고쳐준다. 그의 아내로서 콜레트가 느꼈을 감정들은 그러나 너무 무겁지 않게 묘사된다.
이 영화는 어린아이들의 내·외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주변인들의 일화는 가볍게 다루는 편이다. 어떤 인물의 감정에 몰입할 만하면 금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일쑤다. 남편의 바람직한 변화 앞에 콜레트가 느끼는 환희와 기쁨, 절정을 묘사한 장면들은 과감한 커트와 감각적인 영상으로 표현된다.
나의 감상은 글쎄 까뜨린이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콜레트에게는 연적인 동시에 남편의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메신저가 되었겠지만 영화 후반에 이르러 까뜨린이라는 캐릭터의 인생이 마음을 저릿하게 했다.
Outro: 재미와 감동을 다 잡은 영화
라셸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가족들에게까지 새로운 변화를 안겨준 발레리. 민들레는 꽃이 지면 홀씨가 되어 계속해서 꽃을 피우는 것처럼, 그녀와 함께한 유년 시절은 라셸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본 영화 마이걸을 오래오래 기억하듯이 나에게서 온 편지 또한 아이들에게 강렬하게 기억될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주인공 같은 시기를 거쳐온 어른들에게 더욱 활력을 주는 영화가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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